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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 칼럼 ] 4·19 혁명 57주기를 맞으며

[ 칼럼 ] 4·19 혁명 57주기를 맞으며


 

 


▲김동진 시사타임즈 호남본사 대표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칼럼 = 김동진 시사타임즈 호남본사 대표] 자유를 부정하고 정의와 동떨어진 정권의 말로는 언제나 비참하다. 독재자 한 사람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국민 전체가 희생당하는 것이 독재국가다.

 

과거 왕조시대에는 체제 자체가 왕을 위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견디는 것을 충성심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의 전횡이 지나치다 싶으면 힘없는 백성들도 참지 않았다. 왕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군대의 힘도 백성들이 궐기하면 지리멸렬했다. 백성들이 무기도 없이 왕에 항의하고 맨 주먹으로 일어나봐야 대부분 군대의 무서운 탄압을 받고 도륙되었다. 비참한 말로가 올 줄 뻔히 알면서도 일어나는 백성의 끈질김은 결국 왕을 쫓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데 성공하기도 한다. 이를 가리켜 혁명이라고 한다. 왕을 밀어내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는 것을 역성(易姓)혁명이라고 하는데 이는 진정 백성이 바라는 혁명과는 거리가 멀다.

 

역성혁명은 왕이 바뀔 뿐 백성의 삶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구한말에 전봉준장군이 이끄는 동학혁명이 삼남 일대를 장악하는 쾌거를 이뤘지만 일본군의 개입으로 끝내 마지막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은 한스런 일이다. 일본강점 하에서도 조선백성들은 3.1만세, 6.10운동, 광주학생운동 등 끈질긴 혁명을 시도했으나 왜군의 총칼에 막대한 희생자를 내고 주저앉아야 했다. 광복 이후 정부수립은 민족의 한을 풀어준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엉뚱하게도 과거 왕조의 흉내 내기 독재자로 변신하였다. 야당을 탄압하고 언론의 자유를 억누르며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했다. 이에 학생이 주도하는 대혁명의 막이 오른다.

 

4.19혁명이다. 대구 2.28고등학생데모, 마산 3.15부정선거규탄시위, 4.4전북대 대학생시위, 4.18고대생데모로 이어지는 일련의 궐기는 드디어 4월19일 전국으로 번졌다. 이 때 희생당한 학생과 시민이 무려 186명이다. 이들 희생자 중에는 고등학생과 대학생은 물론 초등학생과 중학생까지 끼었다. 그들도 데모군중에 끼었다가 경찰이 쏜 총탄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대학이 중앙대다. 한강다리를 넘어 집합한 곳이 하필이면 경찰을 관장하는 내무부 앞이었다. 지금 을지로 2가에 있는 외환은행 본점자리다. 전국경찰의 총본산인 여기서 6명이 쓰러졌다. 이들의 장례는 4월26일 이승만 하야이후 성대하게 치러졌으나 젊은 넋을 서러워하는 가족들의 애달픈 울음소리는 천지를 울렸다. 법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서현무 양은 경찰의 모진 고문을 받고 두 달 후 병원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없이 쓸쓸하게 숨지고 말았으니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중앙대 교우들은 먼저 떠난 혁명동지들을 기리는 큰 탑을 교정에 세우고 오고가며 행여 그리운 친구들이 돌아올까 멈칫멈칫 뒤돌아보지만 가신임은 아무 말이 없다. 눈물을 뿌리며 통곡을 해도 메아리소리도 들리지 않는 메마른 교정에서 몇몇 뜻있는 친구들이 아이디어를 짜냈다.

 

꽃다운 나이에 혁명의 희생자가 된 유일한 여학생 서현무와 약학과 3학년이던 김태년을 짝지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앞장선 사람이 이춘근과 김정일이다. 이들의 제안은 우여곡절 끝에 양가의 승낙을 받았다. 조촐하지만 수많은 학우들의 눈물과 오열 속에 두 사람은 하나가 되었다. 세상을 떠났으면서도 그들의 넋은 가족과 학우들의 따뜻한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영혼결혼! 도하 신문은 이 사실을 널리 알렸다. 4.19혁명 동지가 이승에서 맺지 못했던 인연을 저승에서 맺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무덤은 국립4.19민주묘지에 묻혀 있으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다. 관계규정에 의해서 생전에 부부였던 사람만 합장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열정이 넘치는 김정일은 팔을 걷고 나섰다. 살아생전에 부부의 연을 맺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독재정권과의 싸움에서 나란히 숨진 동지가 넋이나마 같은 음택(陰宅)에서 함께 눕도록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보훈처와 묘지관리소 측에 끈질기게 진정했다. 그 열정에 감복한 관계기관에서 허락하여 합장이 성사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비석에 신랑 김태년만 각인되었다. 똑같은 4.19유공자인데 신부의 이름은 빠진 것이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이 사정을 알게 된 이가 사호선문학회(四護旋文學會) 멤버들이다.

 

4.19호국정신을 선양하기 위해서 四 護 旋이라는 한자이름을 지은 단체다. 회장 임정순을 비롯한 회원들은 모두 시인 소설가 수필가들이다. 이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모두 활용하여 정당한 유공자인 서현무라는 이름을 비석에 새겨야 된다는 캠페인을 벌였다. 이들의 열정과 정성이 하늘에 미쳤음인가. 결국 당국에서도 영혼결혼 부부 김태년과 서현무 이름을 나란히 새겨 무덤 앞에 세웠다. 참으로 오랜만에 두 사람의 넋도 하늘에서 웃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듯 감동적이지 않은가.

 

마침 4.19묘소에 참배 왔던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안철수의 시대에 밀려 아깝게 탈락한 손학규께서 묘소 앞을 지나다가 그 사연을 알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머리 숙여 추모의 정을 표한 것은 혁명에 대한 존경의 표현을 담아냈다

 

이제 4.19혁명 57주년을 맞이하여 4.19혁명공로자회와 묘소를 관장하는 강북구에서는 4.19혁명의 세계화운동의 일환으로 국제학술대회를 여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하니. 4.19혁명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국민의 가슴을 파고드는 영원한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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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 호남본사 대표 ksk367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