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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한마음교회 간증(9) ] 혼혈아! 나는 진짜 아버지를 만났다!

[ 한마음교회 간증(9) ] 혼혈아! 나는 진짜 아버지를 만났다!
 

 

 

 

[시사타임즈 = 춘천한마음교회 박은래] 안녕하세요? 저는 춘천 한마음 교회 박은래입니다. 생긴거와 다르게 한국말 너무 잘 해서 놀라시는 분들 계실 거예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저의 주인 되어 주셔서 자유하고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신 간증을 나누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춘천한마음교회 박은래 씨. ⒞시사타임즈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60년대 말 독일에 간호사로 가셔서 거기서 저를 낳으셨어요. 그런데 저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것은 아는 것이 없어요. 이름도 나이도 국적도 모릅니다.

 

제 나이 4살 되던 해 저는 외가댁이 있는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요. 독일에서 왔다는 칭호는 저의 수식어였구요. 저는 별로 상관 안했어요. 왜냐면 당시 대한민국보다 잘 사는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저는 제가 대단한 가문에서 태어난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학교에 입학해서 학년이 올라갈수록 제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어요. 아버지가 없다는 것도 큰 충격이며 상처인데 사람들에게 부모님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할 수밖에 없게 하는 남다른 외모를 가졌잖아요, 학년이 올라갈수록 부모님에 대해 묻는것과 독일에서 왔다는 말이 부담스러웠어요.

 

초등학교 5년을 좋아하던 남학생이 있었는데요, 그 남학생도 저를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5학년 때 친구 남학생이 은래는 집안이 좋지 않으니 사귀지 말라고, 김 누구를 사귀라고 그래서 실제로 마음을 돌린 사건이 벌어졌어요. 어린 마음에 좋아하는 친구를 잃었다는 아픔도 컸지만 나의 집안!! 뿌리!! 족보 없는 아이! 이것이 그때부터 제 마음에 넘지 못할 산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그 때부터는 제 신상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함구하기 시작했어요.

 

중학교에 입학 했을 때는 저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는데 단 몇 일만에 제 이야기는 많은 아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구요.

고등학교는 중학교와 꽤 먼 곳으로 이사를 가서 다니게 되었는데요. 어디서 어떻게 알았는지 고등학교 입학한 지 딱 이틀 만에 저에 대한 모든 것이 다 알려진 거예요.

 

저는 그렇게 짧은 시간에 소문이 퍼지는 것을 보고 사실 충격 이었어요. 처음 보는 친구들도 다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정작 저는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데 전교생 모두는 저의 아버지가 독일 사람이라는 거예요. 참 난감 더라구요. 나도 모르는 나의 아버지에 대한 것을 어떻게 안다고 하는 건지. 그것이 남의 상처인지도 모르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들춰내고 소문내고 하는 아이들이 너무나 싫었어요.

 

한번은 고2때 담임선생님께서 쉬는 시간에 들어오셔서 가정환경 조사를 한다고 하시면서 ‘아버지 없는 사람 손 들어봐! 어머니 안 계신 사람 손들어 봐!’ 이러시는 거예요! 기가 막혔어요. 물론 저는 손 안 들었죠.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저 선생님은 부모님이 다 계셔서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전혀 모르시는구나!’ 했어요.

 

고3때는 세계사 선생님께서 다음 시간까지 자신들의 족보을 알아오라는 숙제를 내주신 적이 있었어요. 저는 일주일을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었어요. 없는 족보를 어떻하나구요!! 그때처럼 나의 출생이 저주스럽고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다음시간 선생님께서 그냥 넘어가셨는데요, 선생님은 잊어버릴 만한 그냥 던진 숙제였지만 저는 속을 다 태우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되었던 거죠.

 

또 길을 가다 가끔 저 같이 한국 사람도 아닌 것이 외국 사람도 아닌 것이 에매한 외모와 분위기의 사람들과 마주치는데요, 서로 눈이 마주치고 지나가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너는 또 무슨 사연이 있어서 그 나라 못가고 여기와 살고 있냐?’ 이런 생각이요.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제가 이렇게 마음에 상처들로 꽁꽁 닫혔있는지 잘 몰랐어요. 왜냐면 저는 고등학교 내내 전교 연예인이었거든요. 제 이름을 모르면서 우리 학교 다닌다 하면요, 단언하건데 거짓말 하는 거였구요, 합창부가 유명했던 학교였는데 무대에 서고 인기가 많아서 복도를 지나가면 얼굴도 모르는 후배들이 ‘언니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해요. 그러면 저는 ‘음, 그래 몇 학년 몇 반 이름이 뭐야?’ 하면서 유명인사 팬 관리 하듯 하면서 학교를 다녔구요, 대학은 음대를 갔는데요, 저희 단과대 안에서 다른 과, 다른 학년을 막론하고 저를 모르면서 우리 학교 다닌다고하면 거짓말 하는 것일 정도였으니까요!

대학 때 한번은 저녁을 먹으러 학교 앞 식당에 들어갔는데 아주머니께서 밥 다 먹고 갈 때 쯤 물어보세요, “학생 한국 사람이여~ 유학생이여?” 그날을 제가 장난을 좀 쳤어요.

“저 한쿡에 온지 7년 됐어요, 7년 되믄 한쿡 말 잘 래요.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나왔어요.

또 한번은 지하절을 타고 어디를 가는 길이었는데 신문을 파는 청년이 제 앞에 서더니 영어로 막 쏼라쏼라 하는 거예요.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제가 영어를 잘 못하거든요. 아마 열심히 공부한 영어 실력을 써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나본데요, 제가 영어를 잘하면 농담하면서 받아쳤을 텐데... 사람들은 다 쳐다보고 너무 당황 스러워서 눈물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큰 소리로 ‘저 외국인 아니거든요’ 하고 중간에 내렸던 기억이 나요

 

버스를 기다릴 때나, 타서도요, 항상 사람들은 저를 쳐다보고 자기들끼리 수군대고 해서 시선이 집중되다 보니까 항상 뭇 사람들을 많이 의식하면서 살았어요, 그리고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누군가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항상 했구요. 또 자아도취에도 심하게 빠졌는데요,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면 궁금해서 쳐다보는 사람도 많은데, 저는 항상 제가 예뻐서 처다 본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대학 2학년 때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를 졸업한 사람이 군대 시절에 저를 사랑한다면서 급속도로 다가온 적이 있었어요. 그러더니 결혼 이야기를 꺼내고, 급기야 군에 있으면서 어머니를 저에게 소개 시킨 적이 있었어요, 저는 말은 못하고 속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어머니를 만났는데요, 역시나 그 어머니께서 혼혈 같다며 아버지에 대해 물으시는 거예요,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그런데 며칠 후 그 남자가 헤어지자는 거예요, 혼자 좋아한다고 하다가 혼자 헤어지자는 그 사람에게 나이 값을 하라고 독설을 하고 그 날 집에 와서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어요.

 

엄마가 놀라셔서 무슨 일이냐고 물으시더라구요, 예기 안 했어요. 어머니께서 걱정하실까봐 이야기를 안 한게 아니구요, 저는 이미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어요.

 

저는 살면서 대인 관계에 관한 신조가 하나 생겼거든요. ‘일주일을 봐도 1년을 본 사람 처럼, 그러나 5년을 봐도 1년을 본 사람처럼’ 누구든 쉽게 친해지지만 상처 받기 싫어서 절대로 마음은 열지 않겠다는 것이죠. 그 대상이 엄마라 할지라두요.

 

살면서 이런 일들을 격다보니까, 족보도 없는 게 시집은 가겠나~ 싶더라구요, 인물 되고 학벌 되고 집안 되는 엄친아는 못 되도 인물 하고 학벌까지는 내가 만들어 볼 수 있겠다 싶어서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제 꿈은 아버지 없는 혼혈아인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나라에 가서 박사 과정을 밟고 교수로 대학에 남는 것이었어요, 출생의 아픔을 명예로 극복해 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한국 사람과는 정서적으로 안 맞는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제가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있었는데요 ‘한국 사람들은, 한국 남자들은’ 이런 말이었어요. 가부장적이고 남녀 차별이 있는 대한민국이 싫었고 남자에 대한 분노가 심했어요. 엄마를 저렇게 만든 것도 남자고, 저에게 상처를 주는 대상도 남자였으니까요. 주변에도 보면 아버지 때문에 힘든 가정도 많았거든요. 그리고 노소를 가리지 않고 남자들 앞에 가면 긴장이 되어 평소 하지 않던 말이나 행동들, 오버액션이라고 하지요. 이런 것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데 저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또 아무 말이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소문내는 여자애들도 싫었어요. 결국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되었고 마음의 문은 철저히 닫혀 버리게 되었죠.

 

그래서 저는 기회만 되면 미국으로 가고 싶었어요. 그 나라는 국적이 다양한, 그리고 종족도 다양한 사람들이 살기 때문에 단지 저의 외모를 보고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것을 묻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구요. 그 사람들은 사생활 묻는 것을 실례로 생각하잖아요, 바로 그 것이 딱 제 스타일이었거든요.

 

모스크바를 비롯해서 외국 여러 나라에 연주를 하러 갈 기회가 종종 있었는데요, 나라를 가리지 않고 한번 나가면 물만난 고기가 되어 들어오기 싫었구요, 들어오는 비행기 대기실에서 한국 사람들의 한국말이 왁자지껄 들리기 시작하면 우울이 확 밀려오곤 했었어요. 그래서 돌아오는 기내에서는 항상 우울했구요.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간 뮤지컬 극단에서 평소에 저를 잘 알던 남자와 우여곡절 끝에 연애를 하게 되었는데요, 내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다 했는데도 헤어지자 이러지 않는 거예요. 또 충격이었어요.

 

그래서 푹 빠졌어요. 제 속을 다 털어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인데요, 어느 누구에게도 속을 털어놓지 못하는 저는, 지독히 외로왔기 때문에 어느새 사람이 우상이었어요. 그런데 헤어지게 되었을 때, 저는 주변에서 혀를 내두를 정도로 한다면 하는 의지가 참 강한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내 의지로 내가 지켜지지 않는 걸 보면서 아! 이래서 시련당하고 정신병원 가는구나 했어요.

 

그때 제가 성당을 다니고 있었는데요, 하나님을 붙들어야 산다는 막연한 생각에 성서를 읽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읽으면서 고민이 생긴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들과 믿음의 선진들을 보니까, 제 삶과는 하늘과 땅 차이인 거예요. 도저히 흉내도 낼 수 없는 삶들을 살다 가더라구요.

 

그런 신앙의 고민을 가지고 살다가, 합창단에 들어가 다니던 중에 춘천 한마음 교회에 다니는 동료가 삶이 180도 변할 것을 보고 내심 놀라고 있었는데하루는 “언니 오늘 작은 교회 예배가 있는데 같이 갈래요?” 하길래 예배에 따라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저를 처음 본 지체가 그러더라구요 “어머! 한국말 잘하시네요!” 제가 어디가나 그 얘기를 듣잖아요, ‘아~ 예~’

 

이렇게 시작된 작은 교회에서, 복음서를 보면서 예수님에 대해 연구를 해보라고 했는데, 누가복음을 보다가 제 마음을 바닥까지 낮추시는 말씀을 보게 되었어요. 누가복음 3장 8절에 세례요한이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하지 말라’‘하나님께서 능히 이 돌들로도 하나님의 자손이 되게 하신다’이러는 거예요.

 

저는 살면서 수많은 기적 같은 기도 응답들을 받았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이고, 내 구원의 확신이라 믿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이 돌들만도 못 할 수 있겠구나!! 이것이 알아지면서 마음이 확 낮아졌어요.

 

또 성경에 천국이 어디 있냐고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에 있다 이러시는데 저는 잘 모르겠더라구요. 내 마음에 천국이 임했는지 아닌지 심증 말고 확증이 안되더라구요. 두려워지기 시작했고 마음이 급해졌어요.

 

그리고 그 때 ‘하나님! 교통사고 나서 죽지 않게 보호해 주세요. 지금 죽으면 지옥인 것 같은데 예수님 만날 때까지만 살려주세요. 그 다음은 바로 데려가셔도 좋습니다’하고 간절히 기도했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계속되는 작은 교회 예배를 함께 하면서, 이때까지 쇠뇌된 것처럼 근거 없이 무조건 믿었던 말씀들을, 내가 이성을 가지고 예수님 시대로 돌아가서 예수님 동네에 살던 사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니까요, 저는 방관자 이상의 태도를 취할 수가 없더라구요, 신기한 기적들을 일으키고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그런 예수님을 따라 다니다가는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종교 지도자들한테 쫓겨나서 사회 생활이 어려울 것 같고, 그렇다고 하나님인 속 시원한 증거도 없고,,, 기적은 구약의 모세, 엘리야, 엘리사도 했잖아요?

 

지금처럼 철저히 사람을 의식하며 방관자로 있겠더라구요. 그런데 구약의 예언에 부활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 기록이 되어 있잖아요? 저는 어려서부터 부활을 들었기 때문에 부활을 모를 리가 없었어요.

 

그런데 누가복음 24장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너무 비참하게 죽었는데, 죽은지 삼일이나 지나서 문 다 닫혔는데!! 제자들과 함께 있는 저에게 와서 ‘평강이 있을찌어다’ 한다!

 

예수님 시체를 붕대를 감아서 우리나라 장례식으로는 염을 해서 삼일 전에 무덤에 넣었구요, 지금 여기는 문 잠궜잖아요,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겠어요? 당연히 귀신인 줄 아는 거예요, 부활이 그렇게 쉽게 믿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닌 것예요.

 

저는 생선을 잡수셨다는 말씀이 왜 기록되어 있었는지 몰랐거든요. 귀신은 만져지지도 않고 먹지도 못하잖아요. 제자들 앞에서 먹는 모습 보이는데도 3년을 함께 먹고 자고했던 제자들조차 ‘오히려 기이히 여기며 믿지 못했다!’ 고 하는데 2000년이 지나서 기록으로 보는 저는 제 이성으로 한번도 검증해 본적이 없이 오래 들었다고 부활을 믿고 있다고 생각 했던거죠.

 

그런데, 예수님 돌아가실 때 자신들도 죽을 까봐 도망갔던 제자들이, 생명을 내놓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다가 순교했잖아요, 순교는 너무 비참하게 죽는 거잖아요, 이걸 보면서 ‘목숨 걸고 증거 했으면 그건 진짜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감정으로 느꼈다거나 눈물이 났다는 예기는 아니구요, 그 비참한 죽음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생명 걸고 증거한 부활의 증인들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임을 믿을 수 있었어요.

 

이렇게 부활이 확증되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과, 성경의 모든 말씀을 내 경험 내 생각을 넣지 않고 확실히 믿을 수 있게 되었어요. 가 보지 않아도 천국과 지옥의 있는 것, 보이지 않아도 영적 존재인 천사와 마귀가 있는 것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믿을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사야서 9장 6절에 예수님에 대한 예언에 이는 한 아기가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하시는 거예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이 말씀으로 제 경험으로 가지고 있던 아버지라는 단어의 이미지가 완전히 깨졌어요. 창조주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셨구나! 생명을 주시면서까지 나를 사랑하신 분이 나의 아버지셨구나!! 이것이 알아지면서 그대로 마음에서 굴복이 되었어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막달라 마리아아게 나타나셨을 때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 간다 하시는데, 니 아버지 내 아버지 따로따로가 아니고 우리 아버지시더라구요, 우리가 종족 민족을 떠나서 한 아버지의 자녀인 것이 부활을 통해 확증이 되었어요. 또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감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족보가 정확히 있더라구요. 성경에 말이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나를 위해 아들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분이 나의 아버지셨구나! 나를 위해 생명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분이 예수님이셨구나!

저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예수님을 내 마음의 주인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이분이 영원히버리지도 떠나시지도 않는다는 말씀에 평강과 안식을 찾았습니다.

 

저는 환경 탓, 나라 탓, 출생 탓하며 살았는데요,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내 마음 주인 되고 내 인생의 주인 되어 살아서 그렇게 힘들었던 거예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후에 찬송가에 나와 있듯이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예수님만 보이는 데 와 !! 진짜 세상도 의식이 안 되고 나도 의식이 안 되고 예수님만 보이는 거예요. 내가 나를 의식하지 않으니까 비로소 나로부터 해 졌어요.

 

그리고 제 입에서 항상 ‘한국 사람들은~ 한국 남자는~’ 하는 게 있었는데요,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나라와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딱 두 부류의 사람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예수님의 피로 하나된 형제 자매를 너무도 많이 주셨어요. 지구 끝 어디라도 부활의 복음으로 세워진 공동체가 있는 곳, 그곳에 제가 있을 곳이더라구요, 그러니 굳이 이 나라를 떠날 이유가 없어진 거예요.

 

이 나라만 떠나면 잘 살 줄 알았는데 이제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과 동행하며 말씀에 순종하고 살면 그것이 가장 잘 사는 길인 것을 알았구요, 이민이라도 가면 자유 할 줄 알았는데 자유는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구요, 마음에서 오는 거더라구요.

 

그리고 어쩌면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 할 자였는데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엄마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서 2년 전 쯤으로 기억 되는데요, 저희는 평생 살면서 곰살맞은 대화를 한번도 하지 않고 살던 모녀였거든요. 그래서 진지하게는 말씀을 못 드리고 ‘낳아주시고 길러주셔서 감사 합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더니 예수님 안 믿으시는 엄마께서“아멘!!” 이러시는 거예요, 깜짝 놀랐습니다. 마음이 많이 열리신 거예요.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어서 자유한 삶을 살고 있는데요. 부활의 주님은 절대 풀 수 없을 것 같았던 아버지 없는 저의 출생의 문제를,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확증해 주셔서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알게 하셨구요, 상처가 많아 마음이 굳어져서 내 마음 나도 모르고 남의 마음도 모르던 제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가 되었어요.

 

실수하고 넘어져서 징계를 받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땐 너무 아픈데요, 히브리서 12장 8절 말씀에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내가 사생자가 아니구나!’나를 사랑하셔서 징계를 하시는 아버지가 계시는구나! 마음이 무너지지 않고 벌떡 일어나게되요.

 

부활의 주님은 저처럼 출생에 대한 또 가족에 대한 상처를 안고 살던 사람도 완전히 해결해 주셨어요.

 

복음은 이 세상 어떤 문제도 다 해결하는 능력의 기쁜 소식입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다 이루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이 간증을 들으시는 여러분 모두도 부활의 주님을 주인으로 믿으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 받고 예수님과 동행하시며 자유하고 풍성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복음이면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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