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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 김봉규의 행복칼럼 ] 두 갈래 길 II

[ 김봉규의 행복칼럼 ] 두 갈래 길 II




김봉규 논설위원 ⒞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전문가 칼럼 = 김봉규 논설위원] 성경의 베드로는 어느 날 물위를 걸어오는 예수를 본다. 중력이라는 자연법칙을 초월한 기적의 사건 앞에서, 베드로의 솔직한 욕망이 발동한다. “예수님! 저도 걷게 해주세요!” 성인(聖人)들은 뭐라고 대답했을까? 아마 도(道)를 설법했을 것이다. “물위를 걷겠다고?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일단 앉았다 일어섰다 100회 실시! 하체가 튼튼해야 하거든, 그리곤 마음을 비워야해! 세상의 집착과 번뇌를 다 내려놓고 무념무상의 경지로! 물아일체의 차원, 알지? 자, 이제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딛고! 그리곤 그 발이 빠지기 전에 다음 발, 또 다음 발, 그렇게 빨리빨리, 유연하게 알았지!”

 

하지만 예수는 달랐다. 베드로를 향한 말씀은 단 하나, “오라!” 그리고 베드로는 정말 물위를 걸었다. 물론 그렇게 오래 가진 않았다. 조금 뒤 그는 물속에 빠져 들어간다. 태풍을 보았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한 사람은 보이는 것만 보고

누군가 보라고 하는 것만 본다.

그렇게 보는 것이,

그가 보고 싶은 것이 된다.

그래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정작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한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진리가 보라고 하는 것을 본다.

그렇게 보는 것이,

그가 보고 싶은 것이 된다.

그래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 않고

단지 보아야 할 것만을 본다.

 

바라봄의 논리가 있다. 당신이 바라보는 것이 당신을 결정한다. 베드로가 예수를 본다. 물론 예수라는 인간을 본 것이 아니다. 그 육신안의 진리,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본 것이다. 그 말씀은 곧 신이다. 따라서 신성이 베드로를 점유하고, 본질이 변한다. 당연히 물위를 걷는다. 그러다 베드로는 파도를 본다. 파도는 피조물이다. 베드로의 본질이 다시 인성으로 복귀한다. 당연히 빠진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지 모르는 세상에 살고 있다. 진정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빛, 그 진리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하늘의 별을 가리키는 수많은 손끝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손끝이 향하는 별에는 관심이 없다. 각양각색의 손들에만 관심이 있다. 고민하며 질문한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행복일까?”

 

클림트(G. Klimt)의 <키스>는 숨 막힐 듯 강렬한, 그러면서도 몽환적인 연인사이의 하나 됨을 보여준다. 황홀함과 짜릿함 사이로 긴장감이 흐른다. 서로를 감싸 안은 황금빛 실루엣은 지금 그 자리에서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 행복은 표면의 현상, 보이는 것만을 바라보는 에이도(εἴδω eido)일 뿐이다. 사랑과 행복, 환희와 순수 그리고 열정은 그 표면의 껍질을 벗겨낼 때 단순하고 본능적인 인간의 욕망에 불과한 것임이 드러난다. 그래서 에이도는 블레포(βλέπω blepo)로 넘어가 그렇게 보이는 것 뒤의 다른 것을 보아야 한다.

 

키스하는 두 사람의 실루엣을 바깥쪽으로만 따라가 보자. 조금 멀리에서 두 사람의 외형만을 보면 사랑의 황홀함으로 위장된 욕망이 거대한 남근으로 드러난다. 심리학에서 남근은 파랑새를 쫒는 소년의 기호이고, 억압된 욕망의 총체에 대한 상징이다. 사랑이라고 부르던 것, 그것은 끝없이 내면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욕망의 덩어리에 불과했다.

 

산을 넘고 산을 넘어 무지개를 찾아 떠난 소년의 끝은 어디일까? 프로이트의 말처럼 억압된 욕망이 바로 나 자신이라면 그 억압을 벗어난 나의 결말은 무엇일까? 별 헤는 밤, 아름다운 꽃밭의 끝, 몽환적 키스의 황홀함에 빠져있는 여인의 발끝은 이미 그 뒤, 끝도 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는 절벽에 걸쳐져 있다.

 

자세히 보자, 여인은 눈을 감고 있다. 정말 살아있는 것일까? 마지막 키스는 이미 이루어진 것일까? 과연 키스를 하긴 한 것일까? 현상만을 진리로 여기는 에이도에서, 다른 각도에서의 바라봄인 블레포를 거쳐, 이제 깨달음의 바라봄인 호라오(ὁράω horao)에 이르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사랑이라는 환상에서 만들어지는 황홀함, 그것은 사실 순수한 본능적 욕망의 표출일 뿐이며, 그 끝은 죽음이다.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죽는 것이다.

 

살아있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호흡을 하고 쾌락을 탐닉하더라도 욕망에 중독된 삶은 이미 죽은 것이다. 중독은 노예상태를 의미하고, 노예는 사고팔 수 있는 상품이며, 상품은 사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물이 아니다. 인간은 죽어야만 사물이 된다.

 

물론 호라오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진리는 지혜롭다. 그래서 늘 가른다.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 죽는 것이다. 하지만 그 진리 안에서, 아니 그 진리로 인해 빛과 어두움, 행복과 불행, 그리고 생명과 죽음이 갈라진다. 어떤 이는 욕망에 중독되어 죽고, 어떤 이는 진정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자신을 희생한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다시 태어난다. 어떤 이에게 출산은 자신의 행복을 파괴하며 몸을 망가뜨리는 귀찮고 고통스러운 일에 불과하고, 어떤 이에게 출산은 새로운 생명을 위한 희생이며 사랑이고, 그 생명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자아의 재정립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십자가는 공동묘지에 있어야 할 죽음의 기호가 되고, 누군가에게 그것은 오히려 생명의 메시지가 된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당신이 바라보는 것이 당신을 결정한다.

 

글 : 김봉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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