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 기고 ] 13살의 아프리카, 소중한 추억의 3년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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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타임즈 독자기고 = 남승헌 중암중학교 3학년] 평범한 일상을 한국에서 보내고 있던 나는 내가 나의 짧은 인생 중에 아프리카를 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고 살아가던 어느 날, 부모님에게 제안을 받게 되었다. 혹시 케냐로 유학을 가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난 나의 귀를 의심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아프리카에 유학을 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문화를 배우고 경험하고 싶은 마음에 제안을 받고 생각한 1달 뒤에 케냐에 가기로 결정했다. 내 나이 13살 초등학교 6학년 때이다.
케냐에 도착했을 때, 처음 1주일은 신기하고 새로웠다. 하지만 점점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그리워져 갔고, 가족들과 친구들이 보고 싶어 잠잘 때 눈물도 나오기 시작했다. 낮선 곳에 적응하기도 힘들었다. 가족들도 함께 있지 않은데다 한국에서 멀리 떨어져 곁에서 위로해 줄 사람도 없다고 느꼈다. 심지어 미국 국제 학교 입학시험을 일부러 떨어져서 한국에 다시 돌아오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 시절에 가장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다. 한국에서 오신 친하신 이모도 크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 때는 단지 다시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힘들 때마다 나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린 말이 있었다. 그것은 엄마가 나에게 매일같이 들려준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었다. 한국을 떠나올 때 공항에서 편지를 건네주시며 말씀하였던 그 말을 떠올리고 난 점점 힘을 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고 그 생각으로 영어공부를 열심히 시작했다. 미국 국제 학교를 들어가기 위해 한 달간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인터뷰, 쓰기, 듣기, 수학 등등 모든 것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다행히 나의 노력 뒤에는 좋은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학교 입학시험을 합격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의 케냐에서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학교에 첫 날 갔을 때, 모든 것이 떨리고 긴장했다. 한국 학교와는 또 다른 학교 수업방식인데다가 기독교학교라서 그런지 전 학생을 일일이 환영해주었다. 학교에 점점 적응해가면서 한국에 있을 당시 가장 좋아하던 축구를 통해 친구들과 친해지기 시작했다. 함께 땀 흘리고, 같이 웃으며 부족하고 외로웠던 부분이 점점 추억을 쌓아가며 친숙해졌고 새로운 학교생활에도 조금씩 정이 들기 시작하였다. 수업도 천천히 조금씩 여유롭게 들리게 되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영어로 대화하고 내가 말을 할 때 친구들이 모두 경청하며 내 말에 집중해주는 것을 보면 알 수 없는 자신감 같은 것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많이 뿌듯했다. 점점 더 나는 케냐에 정이 들기 시작했고 선교사댁에 있었기 때문에 가끔 봉사활동이나 슬럼 지역으로 가서 예배도 드리고 함께 축구도 하며 친구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다. 굉장히 어렵게 사는 지역을 방문했을 때도 아프리카는 축구 공 하나로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국제학교와 달리 그들은 잘 못 입고, 허름하지만 내가 갈 때마다 스티브라고 이름을 불러주며 매번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어느덧 나는 선교지역 안에 내 또래 아프리카 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아프리카의 생활이 싫지만은 않았다.
6,7,8학년을 다보내고 늘 여름방학이면 한국에 나오게 되는데, 이번 여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땐 다시한국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부모님 말씀을 듣게 되자 무척 서운하고 마음이 아팠다. 떠나는 줄도 모르고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왔기 때문이었다. 3년 동안이나 케냐에 살면서 정이 듬뿍 들었고 아프리카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몹시 섭섭했다.
한국에 왔을 때 부모님께서 케냐를 방문한다는 말씀에 혹시 다시 가서 짐도 가져오고, 친구들한테 작별인사도 할 겸 함께 갔다 와도 되냐고 조심스레 물어보자 허락을 하셨다. 그 대신 조건이 하나 있었다. 이번에 갈 때 코트라에서 진행하는 뷰티패션쇼에 통역을 맡아서 해주었으면 한다는 조건이었다. 난 케냐만 다시 갈 수 있다면 뭐든지 다 하겠다는 생각으로 흔쾌히 수락하였고, 7월20일 날 케냐로 출국했다.
다시 방문한 케냐는 정말 반갑고 내 집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약속했던 일 때문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통역하는 일을 시작했다, 봉사활동으로 슬럼 지역에 위치해 있는 로컬 고아원을 방문하여 음식과 가방도 나누어 주고, 차가운 바닥에 매트도 깨끗하게 깔아주었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을 보니까 나까지 기분이 뿌듯했다. 안 좋은 환경에서도 매일 웃으며 사는 슬럼의 아이들을 보며 나는 내가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만족하자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일행 중 갑자기 밤에 아프셔서 새벽에 함께 병원으로 달려가 통역을 해드려서 칭찬받은 기억도 새롭다.
매일 현지 케냐여성들에게 뷰티를 가르치시는 엄마 곁에서 열심히 통역하는 사이 시간도 빨리 갔다. 이번 통역하는 일은 소심했던 나에게 용기를 심어주었고, 안내하면서 함께 간 원정대 어른 분들과도 친숙해졌다. 어느새 모두가 최선을 다해 준비한 뷰티 패션쇼 날이 다가왔다. 아침 일찍부터 메이크업을 받는 모델들도 구경하고 모델 워킹 리허설을 하는 모델들을 보며 매우 흥미로웠다. 패션쇼가 시작하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통역을 돕고 다 끝났을 때는 뿌듯함을 느꼈다. 한국의 뷰티패션이 아프리카에서도 멋지게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2주반 동안이나 행사와 일행에 대한 통역을 돕느라 친구들과는 만날 시간이 짧았고 한국가기 전 1주일 밖에 남지 않았지만, 지난 3년 동안 아프리카에서의 많은 추억과 기억을 가슴에 담을 수 있었다. 남은 일정은 정들었던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도하고 안부도 물으며 추억에 남을 수 있도록 재미있는 시간을 친구들과 보냈다. 언젠간 다시 만날 날을 기원하며 아쉬운 아프리카 일정을 마치고 돌아왔다.
케냐에서 보낸 3년은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갈 것도 돌아올 것도 예정되어 있진 않았지만 내 작은 인생에서 소중한 것들을 경험하고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잊을 수 없는 아프리카의 빈곤과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국제학교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것은 쉽게 체험할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한국 친구들과도 어울리며 더 나은 세상으로 발걸음을 딛기 위해 지금부터 열심히 공부할 예정이다. 언젠가 친구들과 세계 곳곳에서 만날 날을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을 만들어 주신 부모님께 정말 감사하고 새삼 한국에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rossliyn academy
중암중학교 3학년
남승헌(Steve,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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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칼럼 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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