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설, 칼럼

[ 전문가 칼럼 ] 중·일의 날조역사를 본다 - 야만(왜)의 식민지 국가 일본

[ 전문가 칼럼 ] 중·일의 날조역사를 본다 - 야만(왜)의 식민지 국가 일본



[시사타임즈 = 이을형 박사]

 

코벨 박사의 연구에서 보는 일본의 실체


한·일 고대사를 연구해 온 존 카터 코벨 박사는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 올바른 연구를 했다. 그의 저서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서』에는 한국 상고사와 관련된 학설이 제기돼 있다.

 

코벨 박사는 369년 가야의 기마민족이 바다건너 왜(일본)를 정벌했다고 했으며, 일본이 역사왜곡을 한 임나일본부설을 부인했다. 그는 또 우리 선조들에 대해 아주 일찍 깬 민족으로 규정했다. 코벨 박사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석기시대부터 다른 곳에서 유입해와 요동과 한반도에 제일먼저 정착한 토박이 주인이었음을 단군항목에서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요동에 일찍부터 선주했으며 고유한 문화를 꽃피웠다는 것이다.

 

중국문화는 우리보다 뒤에 은에서 비롯됐다는 것도 이미 논한바와 같다. 존 코벨과 알란 코벨 모자는 요동과 한반도 일대 청동기 시대에 이미 우수한 종족인 한민족이 선주해 있었고 중국과는 다른 별도의 문화를 가진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단군의 실재 존재를 간파해 냈다.

 

코벨 박사 모자는 4세기 한국의 기마민족이 일본을 정벌한 것을 증명하는 예로 말(馬)과 관련한 유물유적과 일본 이소노가미(石上)신궁의 칠지도(七支刀)를 언급하고 있다.

 

코벨박사 모자의 이 같은 주장은 제3국 학자가 보는 한·일 고대사론이기에 한국사를 위해 더없이 중요하다. 일본 문화는 불교와 그 저변에 무교(巫敎)가 자리 잡고 있는 것까지 한국에서 간 문화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이런 역사를 생각하지 않기 위해 역사왜곡에 더 비중을 둔다. 때문에 일본의 신토가 한국의 무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아는 일본인은 드물다.

 

한국무속은 일본에 가서 미화되고 일왕 숭배사상과 결합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유교 지배층과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비천한 것으로 격하됐다.

 

코벨 박사는 “일본에 있는 고분 발굴과 연구가 자유롭게 허용된다면 고고학은 과거 일왕의 존재를 제대로 밝혀 낼 도구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일제시대인 1920년대 초 일본은 고고학자들로 하여금 경주일대 고분을 발굴토록 해 여러 점의 아름다운 금관, 귀 거리, 허리장식 띠 등 수많은 부장품을 확보했다. 이들은 또 규슈(九州)의 한 고분에서 말과 배 그림으로 뒤덮인 벽화를 찾아냈다. 여기에서는 금동 관만이 나왔을 뿐 금관은 출토되지 않았다.

 

이러한 고고학 연구에서 밝혀진 것은 5~6세기 한국은 왜(일본)보다 월등히 앞선 ‘선진국’이라는 사실이었다. 일본은 당황한 나머지 고고학 발굴을 금기시하게 됐다.

 

일본 관서지방 나라평원에 있는 일왕 고분들은 발굴이 엄격히 금지돼 있다. 만약 발굴된다면 부장품들은 한국이 선진국인 사실을 입증하는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 조치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고고학은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1872년 아이지겡(愛知縣) 사가이(堺)에 있는 세계 3대 무덤중 하나라는 인덕왕릉(仁德王陵)이 산사태로 그 유물이 나온 적이 있다.

 

그 유물은 미국 보스턴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인덕왕은 백제 근초고왕의 왕손이다. 인덕왕은 일본의 첫 왕이 된 오진 왕(應神王)의 아들로 왜왕 2세다.

 

일본은 인덕왕 위에 14대나 왕이 있는 것 같이 역사를 조작해 가르치고 있으나 앞서 원고에서 기술한 대로 1~14세 까지는 허수아비 왕으로 있지도 않은 가공의 왕들이다.

 

5세기 초 한국에서 건너간 유민들이 일본에 왜국을 세웠다. 기마민족이 건국한 왕1세가 바로 오진 왕(應神王)이다. 오진왕은 일본의 첫 번째 왕인 것이다. 이는 실존한 인물이다. 그러나 일본은 자기들의 열등한 것을 숨기기 위해 역사를 조작하고 지금 일본 정치인들도 이 조작한 역사가 사실인 것 같이 믿으나 모두 거짓인 것이 전 세계에 알려져 있다.

 

우리는 고대부터 일본에 건너가 왜를 세우고 그들을 지배했다. 가야(伽倻) 또는 가라(加羅)는 신라보다 100년이나 늦게 세운나라이나 가야(伽倻)는 당시 쇠와 농산물이 풍부해 교역을 하던 왜국에 진출, 그 곳에 임나(任那)라는 작은 분국(分國)을 만들고 연맹해 신라·백제에 대항했다.

 

임나(任那)는 왜국에 세운, 왜 땅에 건설한 우리 식민지다. 일본은 이에 대해 거꾸로 왜가 한국에 임나(任那=미나마)를 세우고 다스렸다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역사는 종종 지배자에게 야합하는 날조된 기록을 남긴다. 김부식(金富軾) 등 야합하는 학노(學奴)는 어느 때든 있다. 그러나 고고학은 단지 있는 그대로의 유물만을 남기고 여기서 진정한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8세기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쓴 일본 사가들은 일찍이 한국에서 건너간 우리 부여기마족의 130여 년간 흔적을 없애려고 있지도 않은 역사를 날조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규슈로부터 야마토(大和) 나라로 들어온 정복자 진무왕(神武王)의 역정을 서기전 660년의 일로 각색한 것이었다. 그 당시 일본은 석기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야만의 상황이었기에 나라도 문화도 없었다. 그러다가 BC300년대에 와서 우리 한민족의 도래로 논농사와 청동기 금속시대로 진입할 수 있었다.

 

한국은 4세기 이전에 이미 이러한 문명을 갖고 있었다. 한국으로부터 철기와 청동기, 도자기 등을 받고 물레 사용법을 익힌 서기 3세기를 일본사회는 석기시대를 막 벗어난 야요이시대(彌生時代)라고 부른다. 이 당시 육로 교통은 보잘 것 없었고 주로 뱃길을 이용했다. 이때 한반도의 가야인 김해는 철광이 있어 한반도 북부와 중국, 일본으로 철을 선적해 수출하는 요지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일본문화에 영향 준 한민족 후손 오진(應神)이 일왕 1대

 

10세기 일본법령집 중 연희식(延喜式) 책에 실려 있는 그대로 일본궁내성좌(宮內省坐) 신삼좌(神三坐)에는 일본 조상신 3분이 모셔져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들은 일본을 세우고 일본을 통치한 한민족이다. 이는 일본 황거(皇居) 대궐서 제사지내는 신위(神位)에도 잘 나타나 있다. 원신(園神=가락국 신라조상)과 한신이좌(韓神二坐=백제조상신 이좌((二坐)가 있는데, 이중 원신인 가야 조상은 왜가 건설되기 전부터 일본 열도에 건너가 많은 일본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한신인 백제 조상도 일본에 많은 영향을 준 결과 백제는 후에 일본에 태양과 같은 나라로 여겨질 만큼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당시 일본(왜)의 문화 수준은 구석기시대인 야요이시대(彌生時代)에 머물러 있어서 중앙집권화 된 통치행정능력이 없었음은 물론 조선에서 건너간 무녀 히미코(卑弥呼)가 부족 100여의 부족을 통일해 일본 최초의 나라인 이도국(伊都國)=사마대국(邪馬臺國)을 규슈(九州)에 세웠다. 하지만 부족국가 수준이어서 국가로 보기에는 미약하다.

 

서기 240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사신이 왜국에 왔을 때 그 곳에서 정보를 들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소규모의 부족장들이 히미코(卑弥呼) 여왕과 더불어 나라지역의 비옥한 땅을 통치한다고 이들은 기록했다.

 

당시 일본에는 무속신앙이 팽배해 수많은 신령들이 있어서 무속적 지배자가 예언을 하며 통치했는데, 강한 신령(神靈)을 받은 자는 거의가 여자였다. 이들은 크고 작은 수로 혹세무민을 하다가 뜻대로 안되면 살아있는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이처럼 미개한 당시 일본은 우리와 상대가 안 되는 역사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서 정벌의 본말을 통틀어 뒤집어 놓는 역사왜곡을 했다.

 

일본이 한국을 정벌한 것처럼 기록해 후일 일본인들이 자기네 역사에 대해서 만족하게 여기도록 한 것이다. 그들은 유민된 한을 역사왜곡을 통해 보상받으려 한 것이었다.

 

그들은 한국인의 월등히 우월한 사실을 비롯해서 일본 문명이 전적으로 한국에 의존해 발달돼 온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특히 일본이 한국을 무력 통치하던 때는 더 심화됐다.

 

최태영 선생과 코벨 박사는 일본이 처음으로 중앙 집권체제가 등장한 것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부여족의 통치에 의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부여족으로 가야를 거쳐 일본에 건너온 유민, 즉 일본에서 390년 태어난 오진(應神)이 왜를 세운 실존인물로 왜왕 1대가 된다.

 

컬럼비아대학 개리 레저드(Gari Ledyard) 교수는 부여족이 바다를 건너와 일본을 정벌한 연대를 369년으로 제시하고 있다. 개리 레저드(Gari Ledyard) 교수에 따르면 부여족이 일본을 통치한 시기는 서기 369년~506년 까지이며, 이는 15대 오진왕(應神王)대부터 26대 게이타이(繼体)왕 이전에 이르는 것이다.

 

 

일본인도 일본역사 불신한다

 

이 당시 일본은 바다 건너 먼 섬이라 대륙문화와 접촉치 못 함으로 문화가 원시시대 그대로였다. 때문에 일본에는 지금도 신이 800만이 넘는다고 할 정도로 신화를 믿는 신국(神國)으로 타락돼 있다. 이들은 해중 섬으로 인해 타민족의 침략을 받지 않아 자존 오만한 속성이 육성됐다. 이러한 신화와 오만한 속성이 합작해 일본을 중심으로 한 신화적 역사를 위조하고 진무덴노(神武天皇)라는 가공의 천황을 조작, 일본을 중심으로 한 신화적 왕조역사를 14대까지 조작한 것이었다. 일본은 이를 통해 가짜역사가 진짜역사인양 위조하고 근대에 와서 명치유신 시대에는 독일을 흉내 내기도 했다. 자신들의 볼품없는 역사를 위대한 역사로 위조해 국민의 용기를 북돋는 흉내다. 지금 일본의 역사는 터무니없는 위조사다.

 

우리 역사를 왜곡하며 제멋대로의 만든 역사인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일본서기(日本書紀) 주(註)에 백제기는 백제 인이 저술한 역사지만 후대에 보존치 못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 백제기를 인용했지만 조작해 인용했다. 이는 본래의 백제기를 말살하고 백제가 일본에 예속돼 일본을 종주국으로 만들었다고 조작한 것이었다.

 

 

중국인도 동방강국이라 칭한 백제

 

일본의 사학자들도 이를 부정하고 있다. 정상광정(井上光貞) 교수도 그의 저서에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편자가 백제기의 원형을 왜곡해 기록한 것도 있는 것 같다”고 언급했다.(일본국가의 기원. P96) 일본인 자신이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불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예를 더 든다면, 일본서기(日本書紀) 일본 천황 33대 스이코 덴노(推古天皇) 26년 추팔월조(秋八月條)에 고구려가 공방물(貢方物)하고 수양제(隋煬帝)의 30만군을 격파한 사실을 언급했다고 한다.

 

공방물(貢方物)은 하국(下國)이 상국(上國)에 토산물을 헌납하고 조공(朝貢)한다는 뜻이다. 동양의 대국인 수를 격파한 세계초강국인 고구려가 해중소국(海中小國)인 일본을 상국(上國)으로 받들고 조공(朝貢)했다 함은 사자가 여우를 두려워 해 상전(上典)으로 받들었다 함과 같은 한심한 위조다.

 

이같이 일본의 역사는 믿을 수 없는 역사다. 학자들도 이를 시인하고 있다. (다음에 계속)

 

이을형 박사(전 숭실대법대교수, 본지 고문)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맑은 사회와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시사종합지 - 시사타임즈>

<저작권자(c)시사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시사타임즈 홈페이지 = www.timesis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