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읍시다 (1704)]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
김미월 저 | 문학동네 | 336쪽 | 14,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삼사십대 사회인이다. 직장을 갖고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그들의 생활은 한시라도 빨리 사회에서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불안으로 매 순간 고통받는 이십대 청춘의 삶과는 결이 다르다. 사회에서 자리잡기까지 산전수전을 겪으며 웬만한 일로는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도록 단련된 그들은 사는 것이 원래 고통스럽다는 진실을 깨닫고 북받치는 감정을 타인에게 들키지 않도록 재빠르게 삼켜내면서 어른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당황시키는 순간은 여전히 찾아오는데, 이제는 확고해졌다고 믿어온 삶의 방향이 뒤흔들리는 때가 바로 그것이다.
첫 단편 「가장 아름다운 마을까지 세 시간」은 일시적으로 삶의 방향성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는 서른아홉 살 여성 ‘양희’의 이야기이다. 자유롭게 혼자 떠도는 삶을 만끽해온 그녀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이라면 겪을 수밖에 없는 근원적 외로움이 엄습한다. 우연히 여행을 함께하게 된 어느 한국인 유학생이 자신을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에 데려다주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헤어진 남자친구와 재회하기 위해 돌아가버린 순간, 양희는 문득 깨달은 것이다. 혼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에 가본들 그곳이 가장 아름다울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오늘의 운세」의 주인공 ‘나’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전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을 느끼고 당황한다. ‘나’는 따돌림당한 끝에 세상을 떠난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슬퍼하는 가해자들과, 팀장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으면서 겉으로는 사근사근한 직장 동료들과 같아지고 싶지 않아서 엇나가다가 외톨이가 되어버린 인물이다. 연락이 끊긴 ‘나’를 걱정하며 찾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나’는 다시 눈을 감을 따름이다.
「질문들」의 소설가 지망생 ‘나’는 자신의 꿈을 부정하는 오빠에게 월셋집 보증금을 빌려주어야 하는 처지다. 집이 계약되어야 새로운 보금자리도 찾고 소설쓰기에도 집중할 수 있는데, ‘나’는 집의 단점을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매번 곧이곧대로 답해주고 만다. 수없이 쏟아지는 질문들에 진심으로 답하면 핀잔을 듣는 지독한 현실이지만, ‘나’는 집필중인 소설 속 주인공을 죽이지 않고 기어코 살려보고자 한다.
「도망가지 않아요」의 ‘완구’는 마흔이 넘도록 반려자를 찾지 못해 외로워하다가 우연히 국제결혼중개소의 현수막을 보고 베트남 여성과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금전으로 관계를 거래하는 국제결혼 시장에서 완구가 꿈꾸던 진정한 사랑은 얻을 수 없다. 로맨티스트였던 완구가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이혼 위기에 처하면서 자기 안의 속물성을 마주하게 되는 소설의 결말이 인상적이다.
「2월 29일」에서는 너무나 완벽해서 환상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던 여행에 대한 기억이 상대방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만 보 걷기」의 주인공 ‘정화’는 같은 도시에서 살았던 연인이 떠난 뒤에야 한 박자 늦게 연인의 시각에서 도시 풍경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사랑이 끝난 후 다시 보이는 추억, 사랑하던 시절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마음에 대해 두 소설은 이야기한다.
표제작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는 아내와 평탄하게 살아가던 남자가 옛 사랑 ‘희수’와 재회하게 되면서 겪는 내적 갈등을 그린다. 남자는 희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단 한 번 털어놓았는데, 그마저도 남의 이야기를 하듯 삼인칭으로 들려주었다.
그러나 김미월 소설의 인물들은 막막한 현실을 기어코 다시 살아가보기로 결심하는데, 그럴 때 그들은 누구보다 듬직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렇게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사십대로 접어들면 그들도 더이상 방황하지 않게 될까. 이 질문에 당장 답할 수는 없겠지만, 김미월이 그들에게 불어넣어준 체념 섞인 꿋꿋한 자세가 있다면 서른 시간 후 지구 종말이 찾아온다고 해도 평소와 다름없는 나른한 일상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가 조명하는 청춘의 끝자락은 과거에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에 대한 갖은 후회로 마음 갑갑한 시기이자, 미래에 대한 불안이 불쑥 찾아와 지금 잘 살고 있는지를 고민하게 되는 시기, 망해가고 있다는 막연한 좌절감을 능숙하게 감추며 일상을 유지해나가야 하는 복잡미묘한 시기이다. 이 낯선 시절을 통과하고 있는 인물들의 내면 풍경을 김미월은 섬세하게 드러내 보인다.
작가 김미월 소개
웅숭깊고 따스한 시선으로 우리 시대의 청춘을 대변하는 작가. 1977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고려대 언어학과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정원에 길을 묻다』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서울 동굴 가이드』,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장편소설 『여덟번째 방』, 산문집 『내가 사랑한 여자』, 옮긴 책으로 『바다로 간 가우디』가 있다. 신동엽문학상, 제1회, 제3회, 제4회 젊은작가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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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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