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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책을 읽읍시다 (300)]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책을 읽읍시다 (300)]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안병직 역 | 이숲 | 424쪽 | 25,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이 책은 일제강점기에 버마와 싱가포르에서 2년 5개월 동안 일본군 위안소의 관리자[帳場]로 일했던 조선인의 일기다. 당시 일본 군부가 조선인 ‘위안부’를 조직적으로 동원하고 위안소 운영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입증하는 자료다.

 

일본 군부는 위안소 정책을 운용하면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처음부터 자료의 생산과 공개를 극단적으로 억제했다. 또 위안소 운영에 관계했던 사람들도 관련 기록을 남길 수 없었기에 지금까지 위안부를 둘러싼 논쟁은 신문·잡지 등에 게재된 2차 자료나 위안부 할머니들의 구술 증언에 의지했을 뿐, 객관적 증거로서 1차 자료를 제시할 수 없었다. 특히 일본 정부가 조사·발표한 『종군위안부 관계자료 집성』에도 조선총독부의 자료는 통째로 빠져 있어 일본의 극우 세력은 ‘물적 증거’가 없다는 구실로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자료의 발간으로 이제 일제강점기에 일본 군부가 조선인 위안부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성노예로 삼고, 이들을 철저히 관리·통제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진실이 됐다.

 

필자가 버마와 싱가포르에 체류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쓴 이 일기에는 위안소 경영에 관한 다양한 정보가 나온다. 단지 이것은 필자 개인의 생활에 관한 기록이어서 정보가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또한 1942년의 일기가 분실돼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하고 버마에서 배치하는 과정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하지만 이 일기는 일본의 식민지배에 협력했던 필자가 해방 이전에 남긴 개인 기록이다. 그리고 1990년대 초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으로 부각하기 이전의 자료여서 필자가 여론의 영향과 무관하게 남긴 솔직한 기록인 만큼 오히려 왜곡 없이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제4차 위안단

 

일본은 1942년 5월 초 제4차 위안단을 동원하기 위해 의뢰인을 경성에 파견했다. 일본의 위안부 동원은 의뢰인을 파견하고 군사령부의 협조를 요청해 위안소 업자에게 모집을 의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경성에 파견됐던 의뢰인이 조선총독부가 아니라 조선군사령부에 협조를 요청한 이유는 태평양전쟁 이후 위안부 동원 업무가 육군성으로 이관되었기 때문이다. 위안소 업자들은 전차금(前借金)을 미끼로 자행한 인신매매와 더불어 ‘유괴나 다름없는’ 사기 수법을 동원해 조선 여성들을 모집했다. 대부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안부가 되어버린 이 여성들은 낯선 타국에서 성노예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

 

이 일기의 필자 역시 처남과 함께 제4차 위안단에 합류했던 인물이다. 제4차 위안단의 존재는 위안부 동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냐면 ‘제4차’란 조선에서 차례로 1차, 2차, 3차 위안단을 조직한 바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4차 위안단에 소속됐던 문옥주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위안부들은 150~200명씩 그룹을 이뤘다. 그룹마다 위안소 경영자와 종업원이 한두 명씩 딸려 있었다. 또한 연합국 최고사령부 연합번역통역국 조사보고서는 1942년 7월10일 부산항을 떠난 일본 군함에 조선인 여성 703명과 약 90명의 일본인 남녀가 타고 있었다고 밝혔다.

 

 

위안소 운영을 일본 군부가 직접 주도했다는 증거

 

제4차 위원단은 일본 군부가 조직했기에 위안소 업자들과 위안부는 군속(軍屬) 대우를 받았고 외국으로 출국하면서도 여권이 아니라 군이 발행하는 여행증명서를 지참했다. 또한 그들은 출국할 때 여객선이 아니라 군용선을 이용했으며 육지에서 이동할 때에도 주로 군용 교통수단을 무료로 이용했다. 그리고 위안부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문제인 전차금의 출처에 관해서도 일본의 전문가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는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군에서 지출되었으리라고 추측하고 있다.

 

필자의 일기나 연합군의 『포로심문보고』에 따르면 제4차 위안단의 위안부들은 버마의 각 지역으로 흩어져 각 부대의 위안소에 부속됐다. 운영자는 ‘영업일보’, ‘영업월보’, ‘월별수지계산서’ 등을 일본군사령부에 제출하고 군의 지시에 따라 위안부들의 신고, 성병검사, 피임기구 배급 등을 맡았다. 개업과 폐업, 위안소나 위안부의 이동 등에 일본군의 철저한 통제를 받았다. 또한 위안부들은 ‘성적 노예 상태’에서 일본군을 상대했으며 설령 이전에 받았던 전차금을 변제해도 폐업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결혼해 ‘부부생활하러 나간’ 위안부도 군에서 불러들이면 위안부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등 성노예 상태에 놓여 있었음을 이 일기는 밝히고 있다.

 

 

작가 소개

 

번역·해제 : 안병직

 

1936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했다. 1965년 서울대학교 전임강사였으며, 2001년 서울대학교를 정년퇴직 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정약용 연구, 한국근대경제사를 전공 하고 있다. 저서로는『대한민국 歷史의 岐路에 서다』,『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등이 있다.

 

박속심 기자(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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