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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책을 읽읍시다 (999)] 회색문헌

[책을 읽읍시다 (999)] 회색문헌

강영숙 저 | 문학과지성사 | 248쪽 | 12,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한국일보문학상, 강유정문학상, 백신애문학상 수상 작가 강영숙의 다섯번째 소설집 『회색문헌』. 현대인의 일상을 파고드는 불안과 파국의 조짐을 세심하게 짚어내 무심하고 과감한 필치로 써 내려온 강영숙은 수년간 발표한 8편의 소설을 묶어낸 5년 만의 소설집을 통해서, 한층 어둠이 짙어진 오늘의 도시와, 그 어두운 미로의 복판을 한없이 서성이는 존재가 자신의 상처를 낯선 타인과 가감 없이 공유하는 기묘한 연대를 그려내고 있다.

 

강영숙의 인물들은 파편화돼 있다. 떠나더라도 붙들 사람이 없다. 알지 못하는 사람을 찾아가 사랑을 나누고, 관계라고 할 만한 감정의 교류 없이 만나다가, 연락이 끊기자 자기 자신을 찾으려 고향으로 간다(「귀향」). 「불치(不治)」의 진욱은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될 만큼 “늘 공격적으로” 일하던 은행원이었다. 그는 대출을 받으러 온 수연과 연인이 되었다가 헤어진 뒤 역시 귀향한다.

 

「해명(海鳴)」의 리리는 일본인으로 대지진 트라우마가 있다. 지진을 겪은 다음부터 깊은 잠에 들 수 없었고, 오직 푹 자기 위해 한국을 찾는다. 자의로 떠나지 않은 경우에도 도착한 곳이 허를 찌르긴 마찬가지다. 「맹지(盲地)」에서 전자회사에 근무하는 ‘나’는 부품 창고가 있는 ‘건수 산업단지’로 외근을 간다. 건수는 개발이 멈춘 일종의 ‘유령도시’로, 나는 짝사랑하는 동료 지영에게 줄 마카롱 상자를 들고 불길한 도시를 배회한다.

 

「검은 웅덩이」에서 25년 동안 일하던 직장에서 퇴직한 정연은 한 무리의 사람들과 술을 마신 뒤 졸다 보니 지하철 막차에 갇히게 된다. 그들이 도착한 어딘가는 그들이 바라는 것을 마법처럼 이루어주는 곳이 아니다. 고향은 알아볼 수 없는 장소가 되어 있고, 이방인에게 서울 북촌은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낯선 곳이다. 반 폐허 도시인 건수에서, 처음 와본 버스 종점 정류장에서, 잘못 들어선 골목길과 지하철 막차 칸에서 그들은 여전한 혼란을 맞닥뜨리게 된다.

 

홀로 길을 떠나는 강영숙의 소설 속 인물은 여정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관문”처럼 만난다. 미친 여자, 점쟁이, 봉사자, 유타 주에서 온 모르몬교도, 대리기사, 아랍 여자, 할머니, 생떼 쓰는 할아버지, 목욕탕의 배구선수들, 갑자기 자라버리는 여자애들…… 여정을 떠난 사람들은 간혹 이들을 그저 스쳐 지나가기도 하지만 대개 이들은 “허락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문턱을 넘어”(「검은 웅덩이」) 말을 걸어오고, 동행하고, 영향을 미친다.

 

세상은 말로 가득 차 있지만 그것은 말이 아닌 말의 거품이라, 강영숙의 인물들에게는 “대꾸할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동시에 그들은 누구에게든 이해받으려는 욕구로 가득 차 있다. 누구라도 붙들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들어줄 이가 없다면 신에게라도 소리를 친다(「크훌」). 대화 상대를 앞에 두고도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못 하고 스스로에게 문자를 보내기도 하는데(「폴록」), 어차피 제대로 전할 수 없다면 아예 말하지 않겠다는 것은 진정한 대화 상대를 갈구하는 것의 다른 말이다.

 

그래서 강영숙의 소설에는 생전 처음 본 이방인과 맘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어 하거나 둘만의 경험을 공유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다시 안 볼 사이”끼리의 대화 한 번으로 모든 것이 달라지진 않는다. 이후에도 불면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부에서 곯아가는 감정들을 노출하여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재난과 고난 이후, 그들이 도달하게 될 곳은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곳,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곳, 절망인지 희망인지 알 수 없는 곳, 다시 현실이기 때문이다.

 

또 눈여겨봐야 할 것은 갈림길에서 만나는 것이 늘 여성이라는 점이다. 갈림길을 만들어내는 것이 여성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확할 것이다. 그간 강영숙의 소설에서 그래왔듯, 『회색문헌』에서도 여성들은 길을 제시하고, 혼란스러운 누군가를 더 혼란 속으로 끌어들이거나, 혹은 그 혼란에서 빠져나올 실마리를 제공한다.

 

타로 점을 봐주고 손금을 보는 점쟁이, 또래집단을 이끌며 길가에 쓰러진 사람들과 노인들을 돌보는 ‘검은 군화 소녀’, 나와 닮아 있는, 어렸다가 어느새 불쑥 성장하는 여자아이들…… 여성은 몸을 바꿔가며 소설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맡는다. 소설 속 인물들은 조금씩 변화하면서 기억 속의 어머니를 떠올리고, 마침내 제 울음에 묻혀 들리지 않던 ‘어머니’의 울음을 듣게 된다. 그것이 강영숙의 소설로써 가능해지는 변화의 지점일 것이다.

 

 

작가 강영숙 소개

 

단정한 듯하면서도 날선 문장, 무심한 어조로 삶의 이면에 숨겨진 불안과 고통을 예리하게 파헤쳐온 소설가. 1967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십대 때는 키가 크다는 이유로 배구와 넓이뛰기 등 여러 종목의 운동선수로 활동했고 열네 살 때 서울로 이주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무역회사 타이피스트로 일하다가 1988년에 소설을 쓰고 싶어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8월의 식사」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기까지 8년 동안의 습작과 직장 일을 병행하는 시간을 가졌다.

 

강영숙은 활동 초기부터 “소설 속 인물들의 발화점에 이른 긴장과 뜨거움과 위태로움이 독특한 미학을 이루며, 인간이 자기 안의 공동에 의해 어떻게 파괴되어 가는가를 마치 임상 보고서처럼 건조하고 냉정한 문체로 섬뜩하게 그려내고 있다”(소설가 오정희)고 평가되는 독특한 소설 세계를 구축한 작가이다. 또 “여성의 성과 육체를 문학적 사유의 매개체로 적극 활용하여 세계의 고통을 통각하고 재현하는 허구적 장소로 삼아 이 시대 새로운 여성성을 표현한 작가”(문학평론가 심진경)로도 평가받고 있다.

 

소설집으로는『흔들리다』와『날마다 축제』,『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를 펴냈으며 장편소설로『리나』를 펴냈다. 특히『리나』는 가상공간을 배경으로 16세 소녀의 8년에 걸친 국경 넘기 과정을 그린 소설로, 중국 국경지대를 유랑하는 탈북자들의 문제를 우리 문학의 자장 안으로 끌어안은 문제작으로 2006년 제39회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 장편소설 『라이팅 클럽』 등이 있다.

 

2009년 문장 웹진(http://webzine.munjang.or.kr)에 장편소설『크리스마스에는 훌라를』을 연재했으며,『라이팅 클럽』은 2010년에 문화 웹진 나비(http://nabeeya.yes24.com)에 연재했다. ‘2008 Seoul Young Writer's Festival’, 미국 아이오와대학교의 ‘2009 International Writing Program’의 참여 작가로도 활동했으며 재단법인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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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